우리 선조들은 풍년농사를 위해 농토를 개간하고 과학적인 농기구들과 농사법을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곳간에 식량이 가득해야 마음이 편하고 나라도 부강했던 오천년 농경문화의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만큼 농업은 소중한 우리의 생명산업이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한국동란 이후 60년대 초반까지로 매년 춘궁기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타계한 허문회교수가 병에 강하고 일반 벼 품종보다 생산량이 약 40%나 많은 통일벼를 개발해냄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우리 선조들은 풍년농사를 위해 농토를 개간하고 과학적인 농기구들과 농사법을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곳간에 식량이 가득해야 마음이 편하고 나라도 부강했던 오천년 농경문화의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만큼 농업은 소중한 우리의 생명산업이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한국동란 이후 60년대 초반까지로 매년 춘궁기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타계한 허문회교수가 병에 강하고 일반 벼 품종보다 생산량이 약 40%나 많은 통일벼를 개발해냄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아시아의 녹색혁명을 이뤘다.그러나 지금도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량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데, 향후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의 식량대란을 점치는 미래학자들의 예고를 그냥 안일하게 넘길 일은 아니다. 보다 과학적인 식량생산 정책이 요구되고 있다.이토록 중요한 농업과 농경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도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1987년 농업협동조합중앙회가 농업박물관을 설립하였고, 2005년 7월 전시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 농경문화연구와 농경유물 발굴, 보존에 노력하여 현재 5천여 점의 농경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면적 3천여 평방미터에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을 갖추고 있다.1층의 농업역사관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농업발달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유물, 영상을 비롯해서 주요 농경유적의 축소모형을 통하여 각 시대별 농경문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이 전시실에서 농업사 연표를 보면, 기원전 1만년 경 ~ 1천년 경에 이르는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직접 생산하였으며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오곡농사를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700년 경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데 이 무렵의 탄화된 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선사시대의 농기구는 주로 돌이나 나무가 되겠지만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마제석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동기시대의 농기구인 따비는 대형화된 농기구로서 이 시기에는 아주 과학화된 농기구로 농사생활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당시의 따비는 조선기대의 따비와 비교해 봐도 형태면이나 크기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청동기시대의 논 유적에서는 주변의 작은 하천을 막아 보를 설치하여 관개시설을 만든 흔적이 보이며 보를 통해 수로로 흘러들어온 물을 다시 논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로와 논 사이의 둑에는 물꼬가 만들어져 있고 가장 높은 논으로 들어온 물이 점차적으로 낮은 논으로 흘러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우리나라에서 철기로 제작된 농기구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며 철제공구의 사용으로 많은 농기구를 쉽게 만들게 되었고 농업생산력도 증대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철제 따비와 괭이, 쇠낫 등 철제농기구를 이용하고 물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논농사가 넓은 평야지와 골짜기로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4세기경인 삼국시대에는 소를 이용한 논갈이와 밭갈이가 이루어지고 철제기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수리시설을 정비하였다. 현재 사적 제111호인 김제 벽골제(碧骨堤)는 한국 최고, 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쌓았고, 원성왕(790년)때 증축되었다.대규모의 수리시설 개발과 우경농사가 시작되면서 논농사가 더욱 활발해지고 고려시대에는 산골짜기의 계곡을 따라 논밭을 만드는 등 국가차원에서 토지 개간을 권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권농정책은 '나라의 근본이 농업'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1429년에 고유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첫 농사서인 『농사직설』을 비롯하여 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농서가 편찬되었다.그리고 조선시대는 작물을 경작하는 과정에서도 과학영농기술을 활용하여 각 작물마다 많은 품종을 개발하였고, 종자를 처리하는 기술도 발전시켰다. 기경법, 시비법, 수리기술, 경작방식 등도 지역에 따른 농업환경을 고려하여 개발하였다.15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가요록』의 '동절양채'편에서는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재배하는 방법으로 난방시설을 갖춘 온실을 짓고 재배관리요령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는 그동안 세계 최초로 인정받았던 1619년 독일의 온실보다 170여년이나 앞선 조선의 온실농업으로 우리 조상의 지혜로운 농업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근현대 농경의 모습을 소개하는 전시관에서는 농업의 발전사를 기록과 영상으로 보여주고 그리고 농기구도 진열되어 있다. 1945년 해방 당시엔 전체 인구의 77%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농업인구가 줄었으나 육종을 통한 신품종개발을 통해 통일벼를 생산하게 되고 1977년 이후부터는 쌀보리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과거에는 인력 중심의 농업이었다면 70년대 이후에는 각종 농기계의 보급과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기계농업과 함께 인터넷을 이용한 농산물 판매가 이루어졌다. 또한 유전공학과 바이오산업이 발달하여 종자의 품종개량 등 첨단농업으로 특화농업분야가 활발해졌다.2층의 농업생활관은 100여 년 전의 옛 농촌들판 풍경과 농경민속, 농가주택, 전통장터의 모습을 통하여 농부들의 생활양식과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 농촌의 들녘 모습을 사계절별로 파노라마처럼 꾸며놓은 초대형 전시시설 앞에서는 농악소리가 울려나올 듯하고 저 멀리 논둑길에 새참을 이고 오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농번기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제때 모내기를 하지 못하거나 벼를 베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협력하여 공동작업을 하기위해 마을의 공동조직으로 두레를 만들었다. 주로 두레 회원은 장정들이었고 이웃끼리 하는 품앗이에는 여자나 어린아이도 참여했다. 어렸을 때 이웃집과 날짜를 달리하여 모내기를 할 때에 품앗이로 참여하여 못줄을 잡아주거나 모판을 나르고 모를 심었다. 거머리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낡은 스타킹을 신고 일해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거머리 때문에 피를 보게 되고 그 자리가 간지러워서 발과 발로 비벼댔던 기억들이 새롭다.농촌에는 마을 입구나 낮은 동산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자리한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그 나무에 동제를 지낸다. 마을 주민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기 위해 드리는 마을 공동제사다. 동제는 대부분 음력 대보름날 지내는 데,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70년대 경제개발정책이 서구화를 부르면서 우리의 민속신앙이 미신이라는 부적정인 인식으로 낙인찍히면서 점점 사라지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핵가족화 되고 있다. 오늘날 농촌은 인구가 점점 줄어 농사지을 사람조차 부족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한국 전통농가의 삶을 모형으로 꾸며놓은 공간에는 안채와 사랑채, 방앗간 등이 있다. 일반적인 농가는 부엌, 안방, 건넌방 등을 갖추고 지붕에 짚이나 새, 띠풀 등으로 만든 이엉을 덮었다. 부엌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한 안방은 안주인을 포함한 가족들의 일상적 거처로 안주인의 바느질, 다듬이질, 옷감짜기 등 가사노동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건넌방은 바깥주인의 차지로 겨울철에는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자리 짜기, 멍석 엮기 등 가내수공업의 작업장으로 활용되었다. 전통장터 전경은 농업박물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다. 농가에서 생산된 농축산물과 생필품들이 거래되는 곳으로 생선가게, 쌀가게, 옹기그릇, 방자유기, 면직물 판매소, 철물점, 엿장수, 주막집 등등을 둘러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시골에 가면 5일장이 서는 데 15세기 후반에 농업이 발달하고 농촌 사회의 분업이 촉진되면서 장이 서게 되었다. 전라, 경상, 충청도 지방에서 먼저 생겼으며 12~16km 간격을 두고 5일마다 열렸다. 고을마다 5~6곳의 장이 다른 날짜에 정기적으로 열렸으므로 각 고을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장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을 장돌뱅이라고 하였다.조선시대 농촌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기도 했지만, 사람 간에 만나고 지역 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문화교류와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농업박물관 지하 1층에는 농협의 역사와 사업을 소개하고 우리 농업의 우수함과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농협 홍보관으로 꾸며져 있다. 1961년 출범한 농협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다양한 고품질의 쌀,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는 김치의 종류, 축산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 기타 세계에 수출되고 있는 농협식품들을 소개하고 있다.한국의 농업, 나아가 세계의 농업은 인류의 생명을 지키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환경을 지키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농업은 홍수예방, 수질 및 대기 정화, 토양 유실방지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인류가 처음 터득한 농업은 마지막까지 인류를 지켜줄 산업이다. ※ 농업박물관 이용안내◆ 서울 버스 파랑 160, 260, 270, 271, 초록 7019, 빨강 9701, 9709번을 타고 농협중앙회에서 하차◆ 농업박물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 1가 75번지◆ 전화 : 02) 2080-5727~8, 홈페이지 : www. agrimuseum.or.kr
흔히 화폐하면 주조화폐와 지폐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화폐는 이뿐만 아니라 금, 은, 동 등의 실질가치 이상의 액면가치를 지니고 있는 보조화폐와 당좌예금자가 발행한 어음이나 수표 등의 신용지급수단인 예금통화가 있다.화폐는 물물경제에서 교환수단으로 이용되는 신용과 약속의 상징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국가 간에서도 서로 통할 수 있는 화폐를 금액으로 나타낸다면 단위 상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화폐시장을 보면, 자국화폐와 외국화폐와의 교환비율 즉 외국환 시세와 금리 차이를 이용한 수익으로 국가 경제를 이루고 있는 선
흔히 화폐하면 주조화폐와 지폐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화폐는 이뿐만 아니라 금, 은, 동 등의 실질가치 이상의 액면가치를 지니고 있는 보조화폐와 당좌예금자가 발행한 어음이나 수표 등의 신용지급수단인 예금통화가 있다.화폐는 물물경제에서 교환수단으로 이용되는 신용과 약속의 상징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국가 간에서도 서로 통할 수 있는 화폐를 금액으로 나타낸다면 단위 상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화폐시장을 보면, 자국화폐와 외국화폐와의 교환비율 즉 외국환 시세와 금리 차이를 이용한 수익으로 국가 경제를 이루고 있는 선진국들이 많다.우리나라도 동북아 금융허브를 꿈꾸고 추진계획을 하나하나 실천해나가고 있는 이유는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전적으로 에너지 수입을 통한 선진 국가경제를 이뤄나가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나라의 화폐 제조기술과 디자인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외국의 화폐를 발행하여 수출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조폐공사가 1988년에 충남 대전시 대덕연구단지 공사 부지에 화폐박물관을 건립하였다. 국내외 화폐관련 자료 12만 점이 시대와 종류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어 세계 화폐의 역사와 제조 기술력은 물론 화폐의 아름다운 디자인도 살펴볼 수 있다.1층 제1전시관은 주화 역사관으로 화폐의 기원과 고대주화, 동서양의 화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2층의 제2전시관은 지폐 역사관으로 우리나라 은행권의 변천사를 비롯하여 은행권 용지의 역사, 북한의 지폐도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의 3전시관은 위조방지 홍보관으로 위조방지를 위한 지폐 제작방법을 소개하고 위조방지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제4전시관은 우표, 크리스마스 실, 메달, 훈장, 세계의 화폐, 수표·어음·채권·신분증·여권·카드 등이 전시되어 있다.제1전시관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폐기관으로 1886년에 설립된 경성전환국이 고종 23년에 개국 495년이란 연기가 적힌 국조를 압인하여 발행했던 거대한 압인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후기 주전소에서 주물사에 의한 방법으로 엽전을 만들던 모습을 축조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화폐의 역사를 보면, 원시사회에서는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주로 곡물, 직물, 가축, 농기구, 모피, 무기, 장식품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물물교환이 활발해지면서 기원전 16세기경에는 조개껍질을 사용하거나 물고기 모양의 청동화폐인 어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기원전 8~3세기경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농기구 모양의 포전이 주조되었고, 이후에 칼 모양으로 만들어진 도전이 제나라를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사용되었다.서양에서도 기원전 6세기경 리디아(지금의 터키지방)에서 서양 최초의 주화가 만들어졌는데, 금과 은의 천연합금의 귀금속으로 동물모양의 금형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곡식 한 줌의 무게라는 뜻이 담긴 3~6그램 정도의 ‘드라크마’라는 은화를 주조했는데 아테네시의 상징인 올빼미와 벼이삭, 지배자의 얼굴, 만든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로마는 서기 1세기경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화폐제도를 확립한 이후부터 황제마다 자신의 초상을 주화에 새기는 특유한 화폐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 오늘날까지도 나라마다 화폐에 인물이 들어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조된 주화는 성종 15년(996년)에 건원중보(乾元重寶)이다. 이후 100년이 지나 숙종 2년(1097년)에 대각국사 의천이 주화의 사용을 주장하여 주전관을 설치하고 1101년에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서 은병(銀甁)을 최초로 발행하였다.조선시대에는 중국 원나라 지폐를 모방하여 태종 2년(1402년)에 조선통보를 만들었고, 숙종 4년(1678년)에 상평통보가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상평통보는 약 200년간 사용되었는데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및 군비확장을 명목으로 상평통보보다 명목가치가 실질가치의 20배에 달하는 당백전을 발행하여 당시에 물가폭등을 일으켰고 조선 말기에 경제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개항기 및 대한제국시대에는 외국과의 무역거래가 이뤄졌는데, 외국화폐는 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상평통보는 동으로 만들어져 불편한 점이 많아 고종 19년에 대동은전을 만들었으며 고종 24년에는 최초의 상설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립하였다.한일합방 이후에는 주로 일본이 발행한 주화를 사용하여 한국화폐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광복과 함께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고 1959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조폐국에서 십환, 오십환, 백환화를 제조·발행함으로써 반세기만에 우리나라 주화가 등장하게 되었다.기념주화는 1970년 ‘대한민국 5000년 영광사’ 기념주화가 외국에서 처음 발행된 이래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주화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열렸던 국제경기 및 각종 행사관련 기념주화들이 발행되었다.제2전시관은 지폐역사관으로 세계 지폐와 우리나라 지폐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지폐는 997년 중국 북송시대 지금의 사천에서 발행된 예탁증서 형태인 ‘교자(交子)’라는 사찰이다. 1023년에는 교자발행소 설립으로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유럽에서는 17세기 초 영국에서 처음으로 지폐가 사용되었다. 금을 다루는 장인이 발행한 예치증서로서 오늘날 은행권의 모체로 여행 중의 도난방지를 위하여 금융업무를 수행하던 금장(金匠)에게 돈을 맡기고 예치증서를 받은 뒤 목적지의 지정된 금장에게 가서 보여주고 돈으로 교환받았다.우리나라 최초의 지폐는 1891년에 제조된 ‘호조 통화태환권’이다. 이후 일본의 제일은행은 조선 정부의 승인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은행권으로 십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구 한국은행권, 조선은행권이 순차적으로 발행되었으며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부터 우리 은행권을 발행하였다.1953년에는 한국전쟁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통화개혁을 단행, 화폐단위를 백분의 일로 절하하여 원(圓)을 환(圜) 표시로 바꿔 발행하였다. 그리고 1962년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통화조치로 다시 화폐단위를 십분의 일로 절하한 원 표시의 화폐를 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제3전시관의 위조방지홍보관에서는 날로 정교해져가는 은행권 및 유가증권류의 각종 위·변조 사례와 이에 대응한 위조방지 방안을 알 수 있도록 상세하게 지폐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분석하여 보여주고 있다.지폐의 위조방지 요소로는, 육안으로 액면숫자를 숨은 그림 옆쪽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돌출은화처리를 하고 숨은 그림, 앞뒤판맞춤, 숨은 막대, 미세문자, 홀로그램, 요판장삼, 숨은 은선, 색변환잉크를 사용하기도 한다.제4전시관인 특수제품관에서는 우표, 크리스마스 실, 메달, 훈장, 세계의 화폐 등을 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우표는 1840년 영국에서 발행된 ‘페니블랙’이다. 우리나라는 고종 21년(1884년) 개화파 홍영식의 노력으로 서구식 우편제도를 도입,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우표 5종을 발행하였다. 크리스마스 실은 19세기 말 결핵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를 지켜보던 덴마크 우체국 직원인 아이날 홀벨의 결핵퇴치기금 마련의 사랑이 1904년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는 1932년 캐나다 선교 의사인 셔우드 홀 박사에 의해 발행되었다.매달은 고대시대부터 체육경기에 그리고 훈장은 중세 유럽에서 신분 표시의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12종의 훈장종류가 있는데, 공적을 세운 국민이나 우방 국민에게 수여하고 있다.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모든 훈장은 5등급으로 나누어진다.이외에도 이 전시관에서는 세계의 화폐와 수표, 어음, 채권 등을 볼 수 있다. 각국의 화폐를 보면 그 나라 고유의 민족적 특징과 예술성을 알 수 있다. 특히 지폐에 실린 인물상을 보면 주로 대통령이나 왕, 학자들이 대부분인데, 덴마크의 200크로네에는 여배우 인물이, 체코의 2000코루나는 오페라가수, 스페인의 2000페스타에는 식물학자가 그리고 5000페스타에는 탐험가가 실려 있어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인물 평가의 잣대를 가름해볼 수 있다.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화폐의 제조기술도 발달하겠지만, 위조지폐를 만드는 수법도 덩달아 발달하는 것을 보면 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박물관이다. ※ 화폐박물관 이용안내◆ 박물관을 찾아오는 길은 대전역에서 지하철을 이용 정부청사역 하차하여 604, 301, 918, 606번 버스 환승하여 KIST 후문 하차- 동부터미널에서는 102번 버스를 타고 정부청사역 하차 604번 환승, 또는 106번 버스를 타고 교육청 하차 604번 환승- 고속도로 이용시 북대전IC 빠져나와 EXPO과학공원을 지나 우회전하여 과학기술대학방향, 유성IC 빠져나온 경우에는 충남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지나서 좌회전하여 과학기술대학 방향◆ 화폐박물관 주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과학로 54◆ 전화: 042)870-1000, 1200 홈페이지: http://museum.komsco.com
이제는 꿈의 바닷길이라 할 수 있는 거가대교가 개통되었다. 이제 거제도는 하나의 섬이라는 외로움을 벗어나 부산까지 연결됨으로써 거제시민들이 부산에서 쇼핑을 하게 되었고 관광객의 숫자도 훨씬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중국의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초를 구해오라고 신하 3천명을 보냈다는 해금강에는 약초가 많이 나는 섬으로 유명한데 그 해금강 가는 길에 해금강테마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해금강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고 신선대 바위와 전망대 그리고 영화촬영지로 알려진 바람의 언덕에는 풍차 한 대가 여유롭게 돌아가고 있다. 마치 파도의 물거품으로
이제는 꿈의 바닷길이라 할 수 있는 거가대교가 개통되었다. 이제 거제도는 하나의 섬이라는 외로움을 벗어나 부산까지 연결됨으로써 거제시민들이 부산에서 쇼핑을 하게 되었고 관광객의 숫자도 훨씬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중국의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초를 구해오라고 신하 3천명을 보냈다는 해금강에는 약초가 많이 나는 섬으로 유명한데 그 해금강 가는 길에 해금강테마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해금강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고 신선대 바위와 전망대 그리고 영화촬영지로 알려진 바람의 언덕에는 풍차 한 대가 여유롭게 돌아가고 있다. 마치 파도의 물거품으로 칠해진 듯 하얀 박물관 건물 또한 뒤지지 않는 절경이다.유천업 관장이 2005년 박물관을 설립하기까지의 동기는 자녀를 키우면서 뭐든지 새것만 좋아하고 조금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버리는 아이들의 물건을 하나하나 모아두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경남 창원에서 호텔지배인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외국인 동료들이 선물로 주고 간 모형 범선 10척을 언젠가 한번 전시한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수집광이 되어 전 세계의 해양지도와 선박 운항장비, 잠수장비 등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이러한 계기로 모은 유물이 무려 40만 점이나 되며 현재 박물관은 조그마한 폐교를 개조하여 5만 점을 전시하고 있다.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해 모든 유물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꿈이라고 한다.박물관 1층은 흘러간 50여 년 전부터 60~70년대의 소박한 생활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세계의 범선, 유럽장식 미술, 중세가구, 도자기 인형, 가면 등 서양유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들은 사진촬영이나 유물을 만지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타보기도 하고 유물과 동화되어 사진으로 담아갈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전시공간이다.1층 전시관은 마치 잃어버린 세월과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공간이다. 크게 구분지어 복도의 공간갤러리, 그때 그 시절, 학교종이 땡땡땡!, 엄마 아빠 어릴 적엔, 카메라 영사기 변천사관, 진공관에서 디지털까지 소리전시관, 추억으로의 여행 등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박물관 입구에는 빨간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일제시대에 종로거리에 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고 해방이 되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이곳 박물관까지 오게 된 한 많은 우체통이다. 말 못하는 우체통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연들이야 어디 백과전집만 못하겠는가 싶다.1층 복도는 벽면에 격동의 역사 50년을 뒤돌아 볼 수 있는 흑백사진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서부터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록사진들이 다양하게 걸려 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가족계획 표어와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짓꼴을 못 면한다” 등. 그 시절에 가족계획 정책으로 가정마다 콘돔을 나눠주어 철부지들은 길거리에서 풍선인 줄 알고 불고 다녔다. 요즈음은 인구가 줄고 있어 다자녀 가정에 대한 지원정책을 펴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그리고 복도 전시장에는 모기 잡는 홈키파, 분무기를 비롯하여 이뿐이 비누, 소진, 안티프라민, 각종 소화제와 어린이들이 좋아했던 과자들로 밭두렁, 골목대장, 뽀빠이, 자야, 아폴로 등등이 있고 초중등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각종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어느 벽면에는 영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홍도야 우지마라, 고개를 넘으면, 팔도 구두쇠, 두만강아 잘 있거라, 하숙생, 전쟁과 평화, 애창 등 원색적인 포스터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어느 동네 골목가게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에는, ‘어서 오십시오, 향 조은 커피 신속배달’이라 써 있는 꽃다방과 조미료 감치미 광고 등이 데롱데롱 매달려 있고 아이들 뽑기와 과자들이 제일 먼저 반기는 진주상회, 유천세탁소, ‘이현세 외인구단 입하’라고 써있는 짱구 만화방, 삼육연탄배달소인 동원 연탄, 해금강 건어물, 학표비니루 대리점, 재건약국, 문간에 미성년 출임금지와 반공방첩 표지가 붙어 있는 삼광사 전당포는 각종 폐물, 은비녀, 양복, 가죽잠바, 시계, 청바지, 자동우산, 수련장 참고서 등을 받는다고 적혀 있다.이 외에도 소리전파사, 광대포 옥이네, 신세계 레코드, 장미 미용실 등이 있으며, 엄마 어렸을 적에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방과 주변에는 자개농, 다리 달린 TV, 작두펌프, 대야, 빨래판, 항아리, 물지게, 솥 등 가재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학교 종이 땡땡땡! 코너는 60~70년대 교실모습으로 조그마한 풍금이 놓여 있고, 칠판 위에 태극기와 대통령 사진, 교훈이 나란히 걸려 있고 조개탄을 때던 난로 위에는 겹겹이 도시락이 올려져 있다. 난로가에는 불조심이라고 써있는 빨간 주전자와 대야가 놓여 있다. 자녀와 함께온 가족들은 조그마한 책상의 의자에 겨우겨우 앉아 사진을 찍으며 추억 이야기를 나눈다.담배가게에는 당시의 담배들이 진열되어 있다. 담배는 1590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190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궐련 담배 ‘이글’이 생산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아사히’, ‘사쿠라’ 등 30여 종이 발매되었다. 그동안 발매된 담배 이름에는 역사적 사연이 담겨 있다. 해방을 기념해 처음 생산된 담배는 ‘승리’였고, 1949년 선보인 최초의 군용담배는 ‘화랑’이었다.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조국을 되살리자는 의미에서 ‘건설’,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파랑새’, ’57년에는 평화와 조용함을 나타내는 ‘진달래’, ‘사슴’이 등장하고 6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화된 담배공장이 신탄진에 준공되면서 ‘신탄진’이, 새마을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새마을’, ‘새나라’, ‘상록수’가 나왔다. 70년대에는 관광객용의 ‘태양’ 수출용으로 ‘진생’ 등이 나왔다.이후로는 88올림픽을 기념하는 88라이트, 88골드, 88맨솔, 90년 엑스포와 IMF때에는 외래어 이름의 담배들이 쏟아져 나오고 담배에 미아찾기, 각종 기념일, 포스터 등 광고가 많이 등장했다.2층의 유럽전시관에는 복도 공간갤러리, 세계 유명 모형범선, 영원한 전설-중세의 기사관, 밀랍인형과 칸느영화 포스터, 프랑스 도자기 인형과 이태리 베네치아가면관, 세계명화관, 유럽장식 미술관으로 구분되어 다양한 유럽의 장식품들이 전시되어 있다.세계 유명 모형범선 중에는 17세기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바다의 군주호’, 492년 콜롬버스가 제1차 항해로 서인도제도 발견시 탔던 ‘산타마리호’, 1805년 영국의 넬슨제독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를 무찔렀던 트라팔카 해전의 무적선 ‘빅토리호’ 등도 이곳에서ㅡ 볼 수 있다.이러한 범선 가운데는 보물선도 있다. 어렸을 때 해적과 보물선 이야기의 만화에 흠뻑 빠져본 적도 있다. 지금도 바다에는 수많은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어 이를 찾는 해양탐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해외언론을 통해서 간간히 들린다.1771년 네덜란드 왕실의 배 프라우 마리아(Frau Maria)호는 러시아의 예카체리나 여제와 예술품 구매계약을 맺고 유럽의 값비싼 조작과 공예품을 잔뜩 싣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출발하여 핀란드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였다. 이 배는 1999년 핀란드 스쿠버다이버들에 의해 발트 해 탐사 중 발견되었다. 배 안에는 수 많은 귀중품 가운데 렘브란트와 반 고옌 등 네덜란드 화가들의 걸작 27점이 손상되지 않은 채 실려 있었다고 한다. 배에 실려 있는 물건의 값어치가 5억 ~ 10억 유로에 이른데, 핀란드 정부는 보물선이 우리 영해에 가라앉았으니 우리 것이라고 하고, 러시아는 사전에 구매계약을 채결했으므로 우리 것이라는 주장이고, 네덜란드는 예술상들에게 돈까지 지불했으므로 자국 소유라고 하여 나라간 인양문제를 놓고도 각축전이 벌어졌다고 한다.러시아 제국시대에 발트 해의 핀란드 해역에 가라앉은 배만 해도 6,000척이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풍랑이나 해적에 의해 난파된 보물선은 유럽뿐만 아니라 사이판 부근, 포르투갈 해역 등 세계 곳곳의 해양에서 지금도 잠자고 있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해양탐사를 통한 보물선 찾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층 전시실에는 또 세계의 화폐 100여 종과 지구본, 술병, 로마의 병사들과 함께 전시된 중세기의 갑옷은 ‘카메롯의 전설’, ‘바이킹’, ‘기적’ 등 영화를 통해 익숙했던 강철갑옷과 투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영국의 밀랍인형관에는 영국의 G.D.F사가 만든 아인슈타인, 베트맨, 마스크맨은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그리고 프랑스 도자기 인형은 크고 작은 인형들이지만 형태가 모두 다르다. 기사 인형의 얼굴, 팔, 다리를 도자기로 구워 얼굴을 메이크업한 후에 옷을 디자인하여 입혔다. 도자기 인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자기 종들과 접시들 또한 장식용으로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우리나라 과거사의 삶과 역사를 뒤돌아보게 하는 1층의 전시유물과 2층의 독특한 서양 장식품들을 보면서 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관광상품이 바로 해금강테마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그마한 폐교를 활용하여 전시관을 만들다 보니 공간이 좁아 40만여 점의 소장품을 찾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못내 아쉬워하는 유천업 관장의 박물관 사랑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해금강테마박물관 이용안내◆ 박물관을 찾아오는 길은 거제대교를 지나 장승포 방향으로 해변가를 따라 거제도문화예술회관을 지나고 해금강 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학동 몽돌해수욕장→ 학동삼거리→ 함목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바람의 언덕이 있는 도장포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해금강테마박물관 주소: 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262-5번지◆ 전화: 055)632-0670~1, 홈페이지: http://www.hggmuseum.com
70~80년대까지만 해도 레저용 지도책 구하기가 어려웠다. 큰 맘 먹고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먹고, 자고, 구경할 수 있는 상세한 관광지도가 없어 물어물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스마트폰, 아이폰을 통해서 지도를 볼 수 있고 그리고 승용차의 네비게이션이 길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편리한 세상이다.현재 미국 국방부가 지상으로부터 20,200㎞의 상공에 16대의 항법위성을 올려놓고 12시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즉 범지구위성항법시스템을 통해 지구 곳곳의 위치를
동양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해를 열두 가지 동물로 나타내어 사주팔자를 표현하고 있다.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성공과 출세로 가는 행운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뱀띠 해에 결혼하여 말띠 해에 출산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광활한 영토를 가졌던 중국인들에게 말은 빠른 이동과 통신수단으로 여겨졌다.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제가 죽어서도 기마병과 함께하고자 무덤 속에 토제말을 묻었던 일이나 칭기스칸이 아시아는 물론 유럽을 정복하는 데 기동력이 빠른 말을 이용하여 성공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보더라도 말은 빠르고 성공을 상징하는
동양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해를 열두 가지 동물로 나타내어 사주팔자를 표현하고 있다.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성공과 출세로 가는 행운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뱀띠 해에 결혼하여 말띠 해에 출산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광활한 영토를 가졌던 중국인들에게 말은 빠른 이동과 통신수단으로 여겨졌다.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제가 죽어서도 기마병과 함께하고자 무덤 속에 토제말을 묻었던 일이나 칭기스칸이 아시아는 물론 유럽을 정복하는 데 기동력이 빠른 말을 이용하여 성공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보더라도 말은 빠르고 성공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다.그래서 중국에서는 새해에 "마따오청궁"이라고 인사를 한다. 이는 마도성공(馬到成功)의 중국발음으로 말과 같이 빨리 성공하라는 의미이다.오늘날에는 이동과 통신수단이 과학적으로 발달하여 말은 승마나 경마 등 레저스포츠로 대할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 민족은 오천 년 동안 말과 함께해온 기마민족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를 보고서야 그 역사를 알 수 있을 정도다.한민족의 오천년 역사와 함께해온 말문화가 사라져감을 안타깝게 여긴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마사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1988년 9월 13일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의 서울경마장 내에 123평의 단층건물로 아담하게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박물관 내의 유물들은 주로 청동, 철기류, 자기류, 토기류, 석기류, 목기류, 피혁, 섬유류와 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회전식으로 꾸며 놓은 신라시대의 말갈춤이다. 5~6세기 신라시대의 사료를 근거로하여 재현한 것인데, 경주 천마총의 벽화를 보고 복원시킨 흙받이, 발걸이, 말방울, 재갈, 금도금을 한 안장 가리개, 천마가 그려진 다래 등 신라인들의 화려한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치장품들이 갖춰져 있다.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경북 영천에서 출토된 철기시대의 청동제 말이다. 이 청동말은 성냥갑 크기로 앞가슴과 꼬리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목걸이에 꿴 채 가슴에 매달게 되어 있다.그리고 말 사육의 기술이 뛰어났던 낙랑시대의 목마, 마구(馬具)문화의 황금시대를 방불케하는 신라시대의 유물들은 정교하고 아름답다.조선시대에 흙이나 돌, 철로 빚어진 작은 말들은 형태가 불안정하고 서툰 솜씨인데 여염집에서 서낭당에 묻어두고 복을 빌었던 산물이었다.말을 탈 때에 가장 중요한 안장은 신분에 따라 만든 재료나 치장이 다르다. 나무에 헝겊을 씌워 만든 안장도 있고 가죽을 씌우고 앞부분을 나전칠기로 장식한 안장도 있다. 그리고 상어가죽으로 앞부분을 장식한 어피(魚皮)안장도 특이하다.전시장 내에는 분야별로 구분지어 각각의 특성을 살려 이해하기 쉽게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먼저 글과 그림 속의 말을 살펴볼 수 있는 화폭과 서적들을 둘러본다. 중국책을 조선시대의 이서 선생이 초역한 <마경언해>는 상・하권으로 말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을 한글로 풀이한 수의학책이다. 조선 광해 8년에 의주에서 말과 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간행된 <마의방(馬醫方)>을 비롯하여 조선 영조 12년에 청나라 유본원과 유본형 형제가 저술한 <원형집(元亨集)>이라는 수의학 서적 등이 있고, 그림으로는 조선 후기 심사정의 <유마도(柳馬圖)>를 보면, 한가로운 봄날 늙은 버드나무 아래 채찍을 든 마부와 드러누워 뒹구는 말 한필의 모습인데 마치 말이 마부에게 장난끼 있는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친밀감을 주고 있다.조선 정미년에 위성과 위환이라는 사람이 이미 팔아버린 선산을 도로 물리려다가 암행어사의 조사로 탄로나 다시 환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암행어사판결문서에는 암행어사의 수인과 함께 말이 그려진 이마패를 세 곳에 찍었다는 게 특이하다. 신앙측면에서의 말은 고대시대에 사유세계에서 왕권이나 지배계층의 상징으로 때로는 영혼을 실어나르는 매신저의 기능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고대 토우의 다채로운 세계, 조선시대 이후에도 말에 관한 신앙은 왕실차원에서 제사하는 마조단을 비롯하여 민간신앙의 형태로 서낭당이나 무당집 등에서도 토제말이 발견되었다.가야시대의 <마형토기뿔잔>은 말의 안장 위에 길쭉하고 끝이 구부러진 우각형 뿔잔을 비스듬히 얹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가야토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경상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토제기마인물상>과 조선시대의 <토제말>, 유순한 몸가짐으로 머리는 떨구고 목은 움츠렸으며 허리를 거쳐 둔부에 이르기까지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석재말>, 석질의 곱고 연한 옥석을 깎아 머리를 들고 네 굽을 모아 질주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옥석제말>을 비롯하여 <청동말>, <금동말><백자말>등을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말이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든 부조로 돌에 새긴 <십이지오상>,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직・월직사자>는 목제조각으로 충청지방에서 상여에 장식하던 것으로 죽은 자의 영혼이 승천하도록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데 낮에는 일직 사자가, 밤에는 월직사자가 각각 시왕에게 인도한다고 전한다.마상배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말에 올라 탄 장군에게 임금이 직접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술을 채워주던 술잔이기도 한데 대체로 굽이 뽀족하거나 높아 불안정하고 바닥에 놓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말 위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자 마상배와 청자 마상배를 볼 수 있다. 말갈춤(馬具)은 말을 부리거나 올라 앉기 위해 또는 말을 꾸미기 위해 쓰이는 모든 장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말갈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철기시대부터이지만,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 이후이다.말갈춤은 그 기능에 따라 말을 부리기 위한 제어용구와 말을 편하게 타기 위한 안정용구 그리고 위엄을 갖추기 위한 장식용구로 구분한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말갈춤으로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청동제 장식의 띠고리와 장식드리개 등 청동금구, 말 안장 후륜에 꾸미는 말띠 꾸미개와 띠고리, 말 머리부분에 장식하는 말머리갖춤 등이 있다.안장의 발전상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진골과 각 품의 등급에 따라 안장의 장식에도 차등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등의 자료에 의하면, 1, 2품관은 상어가죽으로 장식하고 언치는 녹색이며 다래는 단자나 쇠가죽으로 하고 배대끈과 굴레는 세 겹으로 꼬아 만든다. 3품도 상어가죽으로 장식하고 언치는 녹색, 유록색에 배대끈을 하고 굴레는 세 겹으로 꼬아 만든다. 4품은 백녹각으로 장식하고 굴레는 두 겹으로 꼬아 만든다. 5, 6품은 백녹각으로 장식하고 굴레는 한 겹으로 만든다. 9품은 백녹각으로 각각 구분하였다.말을 탈 때 발걸이는 가죽으로 사용하다가 철이나 구리를 사용하였다. 그 모양은 고리형이거나 발 밑부분이 닿는 부분은 평평하고 넓게 만든 모양이거나 넓고 원형으로 만든 것 등 다양하다.이 외에 임금이 행차할 때 호위하던 의장용 기치, 귀신의 얼굴을 새긴 말방울, 말굽에 부착하는 편자, 말의 소유주를 식별하기 위해 불에 달구어 말의 엉덩이 등에 찍는 쇠도장인 낙인, 말 양 옆구리에 매달았던 행낭과 길마, 전투마의 눈만 내놓게 하는 가리개, 고려시대의 공민왕이 손수 그린 출렵도가 있다.좀 이색적인 자료로는 마구간이나 말의 몸에 붙여 무병을 빌었던 부적, 말에게 약을 먹일 때 쓰던 약질이 등이다.조선시대엔 말이 주로 교통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에 파발역에서 말을 쓸 수 있는 한도를 표시한 마패는 일종의 공무원 신분증 같은 것이다. 마패에는 말이 하나에서 열 개까지 그려진게 있다고 기록에는 전하나 현재 다섯 개가 그려진 마패까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마사박물관이 자랑하는 소장품의 하나는 조선 헌종 15년(1894년), 당시의 전국 목장의 실태를 지도 위에 나타낸 전국 목장 분포도이다.마사박물관이 서울 경마장 안에 위치해 있어 주말이면 경마장을 찾는 레저스포츠 애호가들에게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과거에는 전쟁과 이동수단으로 이용했던 말이 이제는 레저문화의 한켠으로 사라져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음이 아쉽다. 경마장이나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는 말이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가장 가까운 동물이 바로 말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마사박물관 이용안내◆ 박물관 위치는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장 내로 전철 4호선 경마공원역에서 하차하여 약 10분거리◆ 마사박물관 주소: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685번지◆ 전화: 02- 509-1283, 홈페이지: http//museum.kra.co.kr
고래 고기는 무슨 맛일까 궁금해서 울산 장생포 고래 고기 원조집을 찾아가 탕을 시켰다.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처럼 뭉턱한 고래 고기에서는 바닷고기에서 느낄 수 없는 묘한 향이 난다. 마치 산짐승들의 구린내 같기도 하고 인도 음식에 들어가는 향내 같기도 하다.그래서 처음 먹어보는 사람으로서는 거슬리지만, 옆 테이블의 바닷가 사람들은 술안주로 나온 고래 수육을 너무도 맛있게 먹는 것이다.고래는 본래 인간이 출현한 제4기 홍적세 중기에 출현하여 육지를 보행하는 포유동물로 살다가 물가에서 살게 되고 점점 바다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래 고기는 무슨 맛일까 궁금해서 울산 장생포 고래 고기 원조집을 찾아가 탕을 시켰다.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처럼 뭉턱한 고래 고기에서는 바닷고기에서 느낄 수 없는 묘한 향이 난다. 마치 산짐승들의 구린내 같기도 하고 인도 음식에 들어가는 향내 같기도 하다.그래서 처음 먹어보는 사람으로서는 거슬리지만, 옆 테이블의 바닷가 사람들은 술안주로 나온 고래 수육을 너무도 맛있게 먹는 것이다.고래는 본래 인간이 출현한 제4기 홍적세 중기에 출현하여 육지를 보행하는 포유동물로 살다가 물가에서 살게 되고 점점 바다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초에는 개나 고양이처럼 크기는 작으나 지금과 같은 골격을 유지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고래는 수중생활에 적응하기 쉽도록 뒷발이 퇴화하여 몸체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나 외형으로 흔적을 볼 수 있고, 앞발은 가슴지느러미 모양이며 포유류의 원형인 5개의 발가락뼈를 가진 것 또는 4개로 퇴화된 것도 있다.포유류의 특징인 몸의 털은 거의 퇴화되고 주둥이 주위에 감각털만 남아있고 폐로 호흡하며 자궁 내에서 태아가 자라고 암컷은 하복부에 한 쌍의 젖꼭지가 있고 피하에 커다란 유선(乳腺)이 있다.고래가 오랜 역사 동안 바다를 무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암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울산광역시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대표 유물로 실제 크기가 가로 10m, 세로 3m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암각화에는 6~7종류의 고래가 새겨져 있는 데 새끼고래를 업고 있는 귀신고래, 작살에 맞은 귀신고래, 미역을 덮어 쓰고 있는 고래, 아래턱에서 배꼽 뒤쪽까지 많은 주름이 있는 흑동고래, 머리가 사각형인 향고래, 고래를 몰고 가는 배, 해체된 고래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그런데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태화강을 따라 바다로 이어지는 가까운 거리의 장생포는 고래들이 새끼를 낳는 장소로 과거부터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고래잡이의 실상을 암각화한 것이다.고래 고기를 맛보기 위해 들렸던 장생포 포구길을 따라 수십여 고래 고기 집이 줄지어 있다. 장생포 초입의 넓은 광장에는 장생포 고래박물관을 비롯하여 고래생태체험관이 바다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장생포고래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고래전문 박물관으로 1986년 포경금지 이후 사라져가고 있는 고래관련 유물과 자료 등을 수집, 보존, 전시하여 고래도시 울산의 역사를 되살려 나가기 위해 2005년 개관하였다.제1전시관(포경 역사관), 제2전시관(귀신고래관), 제3전시관(어린이 체험관)을 비롯하여 고래영화 상영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제1전시관인 포경 역사관은 한국의 포경, 장생포의 근대 포경, 세계 근대 포경 관련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대표적인 전시물은 수염고래인 브라이드고래와 이빨고래인 범고래 골격으로 이 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물이며 이 외에도 실물 가까운 크기로 재현해 놓은 반구대 암각화 모형, 3D영상관, 실제 포경시에 획득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우리나라 포경의 역사를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인 곳은 반구대 암각화로 선사시대부터 작살과 그물을 이용하여 고래잡이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영의 연대도 조개무지(사적 제335호)에서도 돌고래 뼈, 석제 작살, 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포경은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나, 오히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쇠퇴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포경활동이 활발해졌다. 한국의 포경선원들은 일본의 포경회사에서 쌓은 경험으로 포경업을 시작하였고, 특히 1946년 최초의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된 후 1947년에는 포경선이 20척에 달하였다. 1961년에는 한국포경어업수산업조합이 장생포에 설립되었다.그러나 지나친 포획으로 해양생태계가 위협받게 되자 IWC(국제포경위원회)가 결성되고 우리나라도 1978년에 국제포경규제조약에 가입하여 회원국이 되었고 1986년 IWC가 상업포경을 전면 중단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포경업도 중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제1전시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와 닳는 브라이드고래의 골격을 볼 수 있다. 이 골격은 일본 고래연구소가 제2기 북태평양 고래포획조사를 위해 포획한 것으로 기증받은 것이다. 전체 길이가 12.4m, 두골 길이 3m, 포획 당시의 실제 무게는 14.6t, 골격의 무게는 850㎏의 암컷으로 골격표본 제작기간만 해도 3년이 걸렸다고 한다.그리고 사람 키만한 브라이드고래 수염, 길이가 7.4m에 이르는 범고래의 골격, 길이 33m에 이르는 대왕고래의 턱뼈와 길이 110㎝에 이르는 대왕고래의 수염, 밍크고래의 두골, 고래 귀, 이빨 등 고래의 종류에 따른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래를 잡는 데 사용된 작살, 포경선 제5진양호, 포경선이 출항할 때 안전한 항해와 고래포획을 기원하는 의미로 달았던 5색 깃발의 서낭기, 착유장에서 고래기름이 만들어진 후 뜰 때 사용한 착유용 바가지, 고래 해체장에서 사용하는 해부톱과 칼, 해부칼 숯돌 등도 볼 수 있다. 세계포경 역사관에서는 각 나라의 원양 포경선과 포경에 사용된 도구를 비롯하여 세계 포경의 역사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11~ 12세기에는 유럽에서 상업포경이 시작되었고, 1700년 초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북극해에서 유럽인들의 포경업이 활발했다. 이 시기에 뉴잉글랜드에서는 미국인들이 긴수염고래 등을 잡는 연안포경업을 하였다.이후 근대식 포경은 스벤드 포인이 1864년 발명한 작살 발사포를 이용한 노르웨이식 포경법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는데, 당시 남극해에 출어한 포경 모선의 수는 41척으로 노르웨이, 영국, 남아프리카, 일본, 파나마, 독일, 미국, 칠레 등이 참여하였다.그러나 1964년 한 해에 48,690마리가 남획되는 등 지나친 포획으로 인해 세계 포경어장은 황폐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IWC는 1986년부터 상업포경을 전면 금지하였다.제2전시관은 귀신고래관으로 귀신고래는 해안 가까이 살면서 암초가 많은 곳에서 귀신같이 출몰한다 하여 귀신고래로 불리운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계 귀신고래는 출산할 때마다 울산 앞바다를 회유하였으므로 울산에서는 친숙한 고래라 한다. 1962년에는 귀신고래의 회유 해면을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하여 보호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환경의 변화가 안타깝다. 현재 세계적으로 한국계 귀신고래는 160여 마리만 살아있을 정도로 희귀동물이다.제2전시관은 귀신고래의 특징, 이동경로, 번식, 발견, 포획 등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1월 ~ 12월경 울산 앞바다를 지나 남해, 서해 및 동중국해에서 번식한 후 다시 3월 ~ 5월경 울산 앞바다를 지나 북상 회유하고 일본 동부태평양측으로도 회유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울산 앞바다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귀신고래의 실물 모형을 본떠서 제작한 전시물을 보면 전체 몸통 길이가 13.5m에 이른다. 귀신고래는 진흙 속을 파헤치면서 먹이를 섭취하므로 다른 고래에 비해 피부에 따개비와 같은 고착생물이 많이 기생한다. 가끔 귀신고래가 자갈해변에서 몸을 부비는 장면이 목격되었다는데 이는 몸에 붙은 따개비를 떨어내기 위함이라고 한다.제2전시관에는 고래 해체장의 복원관이 있다. 이곳에는 포경의 성행 초기였던 1961년에 준공된 것으로 장생포에 있던 4개의 해체장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이다. 고래를 잡은 후 포경선에서 해체장으로 당겨 올릴 때 쓰이는 밧줄, 고래를 삶을 때 그리고 생고기를 외국으로 수출할 때, 기름을 짤 때 고래고기의 무게를 달았던 저울, 고래를 끌어 올리기 위한 수동식 기구와 자동식 기구들, 고래를 삶는 솥, 고래 기름통, 저장창고 등을 볼 수 있다.최근 들어 장생포를 비롯하여 울산, 포항 등지에 밍크고래의 개체수가 많아져 그물에 걸리거나 죽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포경위원회로부터 불법포획은 금지되었지만, 상업포경 모라토리엄 결정과 관련한 이행조치에 따라 혼획 및 좌초로 죽은 고래에 대해서는 시·군·구의 허가를 받아 상업적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울산시는 장생포를 고래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해 2013년에는 고래해체장을 건립하여 장생포에서 고래해체를 하고 있다.1996년부터 2011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포획이 금지된 밍크고래 등 고래 1천여 마리가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다른 고기와 섞여 잡히거나 좌초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불법 포획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허가한 포획 수보다 늘어나고 있어 단속강화대책이 요구되고 있다.고래박물관 1층에 마련된 제3전시관은 고래의 진화과정, 수염고래와 이빨고래의 비교, 고래의 회유도, 고래 뱃속길, 영상실, 생태학습실 등이 있다.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켜 오래도록 장생포의 고래이야기를 심어주고자 체험식으로 꾸며져 있다.고래박물관, 인간과 동시에 출현하여 육지에서 바다로 간 포유동물의 역사와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모토(母土)를 그리워하는 귀신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래박물관, 장생포 앞바다는 자꾸만 파도를 육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 장생포고래박물관 이용안내◆ 교통편: 버스 이용시는 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246번 승차ㅡ 장생포고래박물관, 신복로터리에서 406번 승차ㅡ 장생포고래박물관, 병영사거리에서 246번 승차ㅡ장생포고래박물관기차 이용시는 울산역에서 1104번, 114번, 117번, 708번 승차ㅡ 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차ㅡ 246번 승차ㅡ 장생포고래박물관비행기 이용시는 울산공항에서 1402번, 412번, 432번 승차ㅡ 공업탑에서 하차ㅡ 256번, 406번 승차- 장생포고래박물관◆ 장생포고래박물관 주소: 울산광역시 남구 매암동 139-29◆ 전화: 052)-256-6301, 홈페이지: www.whalemuseum.go.kr
약이 귀했던 어렸을 때, 산에서 옻을 올라오면 할머님이 밤나무 껍질을 달여 그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면 두드러기처럼 올라온 피부가 말끔히 가라앉기도 하고 감기에 걸리면 탱자 열매를 달인 신맛에 몸을 움츠리고 침을 질질 흘려가며 마신 적이 있다. 이러한 치료법들이 약이 귀한 시절에는 민간요법이었다.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고도 많아지고 질병도 늘어나고 있다. 병원균도 약의 성분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저항력이 강해져 마치 균과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그래서 질병으로부터의 고통을 벗어나는 삶 또한 인간이 추구
약이 귀했던 어렸을 때, 산에서 옻을 올라오면 할머님이 밤나무 껍질을 달여 그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면 두드러기처럼 올라온 피부가 말끔히 가라앉기도 하고 감기에 걸리면 탱자 열매를 달인 신맛에 몸을 움츠리고 침을 질질 흘려가며 마신 적이 있다. 이러한 치료법들이 약이 귀한 시절에는 민간요법이었다.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고도 많아지고 질병도 늘어나고 있다. 병원균도 약의 성분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저항력이 강해져 마치 균과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그래서 질병으로부터의 고통을 벗어나는 삶 또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기에 의학의 발달은 지속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의학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주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의학서적과 약재 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직접 의술을 배워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중국의 의술이 삼국에 전래되면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의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백제는 자신들의 의술을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고려시대에는 의학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연구를 시작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서인 「향약구급방」을 편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우리 체질에 맞는 의학연구의 성과물인 「한약집성방」,「의방유취」, 「동의보감」을 3대 의서로 손꼽고 있다.특히 「동의보감」은 조선시대 최고의 의학자인 허준에 의해 1610년(광해군 2년)에 간행되었는데,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1537년에 허준 선생이 태어나 성장하고 「동의보감」을 집필했던 서울시 강서구(과거에는 양천현)에 강서구청은 2005년 허준박물관을 설립하여 허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초대 박물관장을 맡은 김쾌정 관장은 1960년대 초 한독의약이 설립한 한독의약박물관에서30여 년 간 관장으로 재임하면서 명실상부한 의약전문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허준박물관에 칸칸이 유물과 자료를 채워나가고 직접 박물관 교실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허준박물관은 2층의 시청각실과 뮤지엄샵, 3층의 전시실을 비롯하여 옥상에 정원을 꾸며 바로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북한산 등지를 바라다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옥외의 약초원에서는 다양한 약초들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하였다.3층은 허준기념실, 약초・약재실, 의약기실, 체험공간실, 내의원・한의원실, 약갈기 체험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허준기념실에 들어서면 허준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본래 허준은 서자라서 벼슬길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집안에 의학에 관심 있는 유학자들이 많아 그 영향으로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허준이 알고 지내던 유학자 중에 유희춘이라는 사람의 얼굴에 심한 종기가 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낫지 않았는데, 허준이 지렁이 즙으로 깨끗이 낫게 하였다. 당시에 민간요법을 통해 많은 사람을 치료하는 허준의 치료법에 감탄한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함으로써 의과라는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종4품의 내의원 첨정이 되었다. 허준은 내의원에서 왕실의 건강을 돌보며 의학연구에 매진하였다.선조 임금이 허준에게 의학의 기본인 진맥에 관한 책을 만들라고 명함으로써 허준은 중국의서 「찬도맥결」, 「의학입문」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수정하여「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그의 최초의 저서를 펴냈다. 연구를 거듭하고 있던 어느 날 왕자 광해군이 두창에 걸려 이를 완치함으로써 선조 임금은 허준을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라는 직책을 주었으나 신하들은 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진 자라지만, 정3품은 서자가 오를 수 없는 벼슬이라 하여 상소를 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물리쳤다. 허준은 의술을 인술로 배풀며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언해두창집요」를 펴내 당시 전염병이었던 두창 치료법을 널리 알렸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의서편찬이 중단되고 선조마저 병으로 승하하자 어의였던 허준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을 가서도 의서 편찬 작업을 멈추지 안했던 허준은 1610년 마침내 15년 만에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동의보감」은 총 2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경편>은 몸 안에 대한 내용과 질병을, <외형편>은 몸의 겉으로 보이는 것과 증상을, <잡병편>은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해 다루고 있고, <탕액편>은 약물에 관한 내용, <침구편>은 침과 뜸에 대해 다루고 있다.「동의보감」은 1,212종의 약재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하였고, 우리나라 산천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의 이름이 한글로 637개나 수록되어 있다,「동의보감」초간본 3종이 현존하는 데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29일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우리나라 의약기술의 역사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허준 기념실에서는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전염병 치료에 관한 의서로 보물로 지정된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등 8가지의 저서들과 옛 의학서들을 살펴볼 수 있다.약초・약재실은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각종 약초와 약재를 소개하는 공간이다. 「동의보감」<탕액편>에서는 약으로 쓰이는 것들을 15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곡부, 과부, 채부, 초부, 목부 등에 나오는 약재들은 음식으로 널리 쓰였던 재료들로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하여 음식을 약으로 쓰기도 하였다.의약기실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약초와 약을 만드는데 어떠한 기구들을 사용했으며 의약기기들이 시대별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전시실이다. 선사시대에는 주로 돌을 이용한 갈돌이나 갈판, 골침을 사용했으며, 흙이나 청동, 곱돌을 이용했던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병의 치료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의학에서는 '1침2구3약'이란 말이 있다. 첫째 침을 놓고, 둘째 뜸을 뜨며, 셋째는 약을 쓰라는 뜻이다. 침과 뜸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의 의약기의 종류도 다양하다.산이나 들에서 약초를 캘 때 사용했던 채약도구와 약재를 가루로 빻는데 사용했던 약연기,약을 달일 때 썼던 약탕기, 약을 만들 때 쓰였던 약숟가락, 약집게 등의 제약기, 액체로 된 약을 담거나 따를 때 쓰는 약성주기는 주로 분청, 백자, 놋쇠주전자 등이 널리 쓰였다.이외에도 약장, 휴대용 약상자, 약도량형 저울 등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전자식 저울을 사용하고 있어 소수점 이하 무게까지 측정이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한쪽에 약재를 올려놓고 다른 한족에는 추를 올려 무게를 쟀다.내의원・한의원실은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으로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볼 수 있도록 모형을 축소하여 꾸며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재생원 등의 의료기관이 있었다.내의원은 주로 왕실 사람들을 위해 진료하거나 약을 짓거나 의학을 연구하는 기관이고, 전의감은 의관들을 뽑는 의과시험을 관리, 의서 편찬, 약재 재배 등을 담당했고, 혜민서는 가난한 백성의 병을 무료로 고쳐주고 가정을 방문하여 치료를 해주기도 하였다. 활인서는 무료병원과 같은 곳으로 가난하거나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고, 특히 전염병이 돌 때 백성을 살피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한의원은 약방이라 불리면서 일반 백성들의 진료를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상황에 따라 내의원에 임시 의료기관을 만들었다. 왕이나 왕비의 생명이 위중할 때 치료법을 찾기 위해 명종 때 만들었던 시약청과 숙종 때 의관과 중신들이 모여 왕의 병과 약의 처방이 잘 맞는 지를 연구한 의약청이 있었다. 그리고 왕자나 공주가 태어날 때 설치했던 산실청이 있다.이러한 의료기관에 근무할 의관은 과거시험 중 잡과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의과의 시험과목은 모두 11과목이었고 합격자 중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의 차별화된 관직이 주어졌다.또 조선 태종 6년(1406년)에 의녀제도가 생겼는데, 양반 부녀자들이 병이 생겨도 남자 의원에게 진료받기를 부끄러워하여 치료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 드라마로 유명해진 조선 중종 때의 대장금은 뛰어난 의녀로 임금의 주치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허준박물관의 체험공간에서는 약 갈기 체험, 약 봉지 싸는 방법, 사상체질 알아보기,「동의보감」에 나오는 인체 내부의 장기 모형도를 통해 인체의 조직 등을 공부할 수 있다. 또한 옥상을 통해 야외로 나가게 되면 70여 종의 약초들이 사시사철 피어있어 약초마다 어떠한 치료에 사용되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한국의 히포크라테스였던 허준이 태어나 남긴 수많은 업적을 실감 있게 볼 수 있는 허준박물관이 서울 근처에 있다는 게 반가운 일이지만, 그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의 민통선 안에 있다. 2001년에 묘소를 찾아갔을 때에는 잔디가 죽어가고 폭우로 봉분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는데 최근 파주시가 묘 앞에 재실을 신축하고 묘소를 보살피고 있어 다행스럽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세계적 기록유산을 남긴 의성 허준 선생의 묘소도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허준박물관 이용안내◆ 지하철로 오실는 길은 지하철 5호선 발산역 3번출구- 버스 6642, 6657, 6630 도는 9호선 가양역 1번출구/양천향교역 4번출구- 도보 10분거리광역버스 1002번 오류동↔시청, 9602번 김포시↔광화문◆ 허준박물관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허준길 87◆ 전화 : 02) 3661-8686, 홈페이지 : www. heojunmuseum.go.kr
인자한 부처의 입을 함부로 열고 찡그리고 수심 가득히 고민에 빠지게 한 목공이 있다. 주인공은 199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된 목아(木芽) 박찬수씨이다. 그는 경남 산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따라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배가 고파서 들어간 곳이 목공소였다. 목조각 생활 50년 만에 그는 부처를 해방시킨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목재 속에는 아무리 봐도 나이테뿐인데,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부처나 아기동자가 되고 예수가 되고 사천왕이 되기도 한다. 기적적으로 생명만 불어 넣으면 박물
인자한 부처의 입을 함부로 열고 찡그리고 수심 가득히 고민에 빠지게 한 목공이 있다. 주인공은 199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된 목아(木芽) 박찬수씨이다. 그는 경남 산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따라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배가 고파서 들어간 곳이 목공소였다. 목조각 생활 50년 만에 그는 부처를 해방시킨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목재 속에는 아무리 봐도 나이테뿐인데,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부처나 아기동자가 되고 예수가 되고 사천왕이 되기도 한다. 기적적으로 생명만 불어 넣으면 박물관 안에서 성큼 성큼 걸어 나갈 태세들이다.경기도 여주 신륵사와 세종대왕릉이 있는 부근에 1989년 문을 연 목아불교박물관은 박찬수 관장이 우리나라의 전통 목조각 및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세워졌다.아름드리 싸리나무 기둥에 청기와 지붕의 맞이문을 들어서면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창덕궁의 축소판처럼 아기자기한 건물과 조각품들이 구불구불한 안내길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의 문, 큰말씀의 집, 한얼눌집, 석조미륵삼존불상, 석주문, 석조 백의관음입상, 하늘교회, 야외조각공원, 걸구쟁이식당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박물관 본 건물은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지어졌는데, 불교관련 유물 총 6,000여 점이 실내외에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예념미타도량참법 제6~10권’, ‘묘법연화경 제1권’,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제24권‘을 소장하고 있다. 먼저 지하 1층 민속유물실 및 영상실에 들어서면 강당에서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라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영상물과 문화재청이 제작한 목아 박찬수 관장의 소개 영상물 “목조각장”을 상영한다.민속유물실을 들어가면서 눈에 띄는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열 명의 대왕이 봉안되어 있다. 치부책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염라대왕은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는데 살았을 때의 선악을 심판하여 상벌을 내리는 지옥의 왕이다. 이 전시실에는 조선시대에 쓰이던 유물들과 다양한 무신도가 걸려 있다. 무신도는 무당들이 받들고 모시는 여러 신들을 그린 그림이다. 주로 한지나 무명 등에 그려지는데 적색, 청색, 황색을 위주로 사용한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옥황상제, 관우, 삼불, 제석, 칠성, 용궁부인, 산신, 홍씨대감, 바리공주 등이며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이 복합된 그림으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형태의 초상화에 가깝다.1층 특별전시실 및 기념품점에는 기획전, 특별전, 유물 교체 전시회가 주기적으로 열린다. 1층에서 어린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목조로 만들어진 동자상이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누워 잠든 모습이나 합장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개구쟁이 끼가 아직 가시지 않아 말을 걸어보고 싶을 정도이다.동자는 20세 미만의 머리를 깎지 않은 승려를 일컫는데 본래 불·보살을 비롯한 불교신들을 따라다니면서 공양과 시중을 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를 가리킨다. 동자상은 주로 지장보살과 지옥의 열 분의 왕과 함께 모셔지며 그밖에 불상이나 보살상과 함께 법당에 배치된다.1층에서 고요동자, 문수동자, 보현동자, 약사관음 등의 조각상을 보고나면 흔히 사찰의 대웅전에 하나쯤 걸려 있는 탱화를 보게 된다. 지장시왕도, 치성광여래도, 영산회상설법도 등이 있다.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설법도를 보면, 정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아래에 비로자나불이 위치하는 데 비로자나불의 오른쪽에 보현보살, 왼쪽에 문수보살이 있고 오른쪽 상부에 지장보살이 있다. 불교에서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고자 부처를 수행하고 보좌하는 자를 말한다. 보살의 특징은 아직 부처가 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불상과는 달리 화려한 장식을 취한다.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수행하는 보살로서 지혜로운 보살로 상징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룬 보살로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머리에 보관을 착용하지 않고 두건을 두르거나 삭발을 하고 여의주와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2층의 불교유물실은 재료별 불상, 불교 경전, 의식 법구, 장엄구, 복장유물, 세계의 불상, 시대별 불교 유물 등을 비롯하여 목조각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2층 나한전의 500 나한들은 5년에 걸쳐 16종의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표정이나 자세가 모두 다른 나한들은 바로 우리 인간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일반 전시물로 볼 수 있는 종은 사찰의 누각 위에 걸어두고 소리를 울려 아침과 저녁 예불을 알리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종의 소리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북 역시 마찬가지이며 목어는 물고기가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수행자들도 졸지 말고 항상 전진하라는 의미로 누각이나 종루에 걸어놓고 아침, 저녁 예불과 법회 때 치는 법구이다. 이외에도 법회 때 악기로 쓰이던 발, 징과 같은 동라, 요령, 목탁, 불자, 죽비, 불패, 소통, 향로 등 의식행사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3층 불교목조각실에는 박찬수 관장이 40여 년 간 조각한 150여 점의 대표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그대로 모작한 작품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박찬수 관장이 원본 그대로 복제해내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 무려 30년이 걸렸다니 인간문화재로서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그리고 부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한 팔상성도 목각탱은 8폭 크기의 20개 목판에 새겨진 부처의 일대기이다. 부처가 도솔천에서 이 땅으로 내려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고, 출가를 하고, 마귀에게 항복을 받은 후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며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고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기까지를 표현하고 있다.이 뿐만 아니라 3층에서 볼 수 있는 약사십이지상은 땅을 지키는 열두 가지 짐승들의 신으로 흔히 우리의 띠에 해당하는 신들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십이지상은 얼굴은 모두 짐승이지만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열두 방위를 지킨다고 한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하도 만지작거려 코끝이 까무잡잡하고 반질거릴 정도이다.절에 가면 무섭게 생긴 사천왕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양한 목조상을 만날 수 있다. 절을 들어가는 중문을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하거나 사천왕 그림을 그려 봉안하기도 한다. 사천왕은 세계의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며 불도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사천왕들은 부릅 뜬 눈에 크게 벌린 빨간 입, 손에는 칼이나 창을 들고 있고 마귀들을 짓밟고 있는 모습으로 가까이 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그러나 사천왕은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세상의 선악을 살피다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 또한 그 결과를 수미산 꼭대기의 하늘인 도리천의 제석천왕에게 보고한다.3층의 전시물들은 박 관장의 목조예술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너무도 많은데 비로자나삼존불상, 관세음보살삼존불감, 수미단, 석가여래좌상, 용문사 윤장대의 모작을 비롯하여 오른손을 턱에 괘고 깊은 사념에 잠겨있는 삼매동자까지 하나하나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이다.박 관장은 이제 목공예 60년이라는 달인의 솜씨를 가지고 나무의 재질과 형태를 살려 다양한 부처를 탄생시켜 해외여행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백여 회의 각국 전시를 가졌고 2010년 4월에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부처가 입을 열다”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손길을 거치면 부처가 청바지 자켓을 입게 될 날도 머지않을 것같다.박 관장은 사립박물관을 세운 선두주자로서 박물관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강하다. 사립박물관은 국가를 대신해서 문화유산을 개인이 수집 보관하고 관리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차원에서 사재를 털어 세우는 공공의 기관으로 정부가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있던 문화관광부의 박물관과도 폐지해버리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 박물관 운영이 해마다 적자이지만, 박물관은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사는 집인 만큼 그만 둘 수 없으며 더욱더 관람객과 어우러져 박물관을 설명하고 해외전시를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 목아불교박물관 이용 안내◆ 교통편: 버스는 서울(강남, 동서울, 상봉터미널)에서 여주종합터미널에 오시어 강천리/걸은리/ 가야리행 버스를 이용 박물관 도착(90분 소요)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의 여주톨게이트에서 나와 여주읍 원주방면 42번 국도에서 7㎞ 또는 원주, 문막방면 자동차 전용도로(북내방면으로 진입 후 좌회전)를 타고 오시면 됨(서울에서 70분 소요)◆ 목아불교박물관 주소: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리 396-2◆ 전화: 031) 885-9952~4, 홈페이지 www.moka.or.kr
최근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금속활자 인쇄술이 인류 역사를 통 틀어 가장 위대한 발명이었다고 발표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0년 금속활판 인쇄술 발명과 1455년에 성경을 인쇄하기도 했지만,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대량 인쇄하여 유럽 전역에 퍼뜨림으로써 종교개혁에 부채질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인쇄술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과 같은 서양 역사를 바꾸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인쇄본인「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최근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금속활자 인쇄술이 인류 역사를 통 틀어 가장 위대한 발명이었다고 발표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0년 금속활판 인쇄술 발명과 1455년에 성경을 인쇄하기도 했지만,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대량 인쇄하여 유럽 전역에 퍼뜨림으로써 종교개혁에 부채질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인쇄술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과 같은 서양 역사를 바꾸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인쇄본인「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을 1377년에 청주 흥덕사지(사적 제315호)에서 간행하였다. 청주시는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를 창안하여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널리 알리고, 인류 문명사에 빛나는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하고자 1992년 3월 흥덕사 옛 터를 정비하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였다.「직지」는 2001년 6월 청주에서 열린 ‘제5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회의’에서 빼어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그 해 9월 4일 등재되었다. 대지 12,400평에 연면적 421평으로 나지막한 산과 어우려져 있는 박물관 내에는 고서를 비롯하여 고인쇄기기, 흥덕사 출토유물 등 약 8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내부의 1층은 기대의 공간과 발견의 공간, 이해의 공간과 체험의 공간으로, 2층은 확산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관에 들어서면 먼저 「직지」와 흥덕사를 설명하는 매직비젼, 「직지」 관련 유물과 흥덕사 출토 자료들을 볼 수 있다.박물관을 소개하기 전에 고인쇄란 무엇이며 한국의 고인쇄기법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두는 것이 박물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붓으로 종이에 직접 쓰거나 베껴 쓴 책은 사본 또는 필사본이며, 나무판에 글씨를 거꾸로 새기고 그 위에 먹을 칠하고 종이를 엎어놓고 부드러운 것으로 밀어서 찍어낸 책이 목판본이다. 나무나 금속으로 글자 한 자씩 만든 것을 활자라고 하며 원고 내용대로 활자 한 자 한 자를 고른 다음 순서대로 책판 틀에 고정시키고 찍어낸 책이 활자본이다. 이 활자본은 다량으로 찍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인쇄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그리고 관청에서 찍어낸 책은 관판본, 절에서 찍어낸 책은 사찰본, 조선시대 국왕, 대군, 왕비 등이 간행한 서적을 국왕 및 왕실판, 서원에서 간행한 책을 서원판, 개인이 자비로 간행한 시문집, 족보 등은 사가판, 민간이 영리를 목적으로 찍어낸 책은 방각본이라 한다. 또한 사진으로 찍어 그대로 인쇄한 것은 영인본, 사진이 아닌 목판에 다시 새겨 찍은 책은 복각본이라 한다.우리나라의 고서는 중국, 일본 책들과 비교할 때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책의 표지는 색깔 있는 그림 등을 넣지 않고 문양을 새긴 나무판으로 눌러서 문양을 은은하게 나타내었다. 이것을 능화판문 또는 책판문양이라고 하는데 독특하게 발달되었으며 그 종류도 시대별로 다양하다.한 가지 책이 여러 권으로 되어 있을 경우 다른 나라에서는 1에서 12까지 숫자를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나라는 한 권일 경우 단(單) 또는 전(全), 두 권이면 건(乾), 곤(坤), 네 권이면 춘, 하, 추, 동 등으로 정확하게 권수를 표시하였다. 이를 권차표시라 한다.또 책을 꿰맬 때 종이를 여러 겹으로 두껍게 하여 앞뒤 표지를 따로 만들고 구멍을 다섯 개 뚫고 책을 꿰매서 단단하고 오래 가도록 하였다. 이것을 오침안정법이라 하며 이같이 책을 꿰매는 방법을 선장이라고 한다. 중국, 일본은 구멍이 네 개 있는 사침안정법을 쓴다.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인쇄 발달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목판본,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등을 각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으며 「직지」의 금속활자 인쇄과정을 9단계로 나누어 밀랍인형으로 재현하였다. 또한 금속활자 주조와 조판에 관련된 실험자료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와 인쇄도구, 목활자, 장정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면,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1966년 불국사 석가탑 2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발견 당시 중간부분까지 많이 부식되어 있었다. 목판으로 찍은 두루마리인 이 불경은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 석가탑을 세우고 이때에 탑 속에 넣은 것으로 인쇄 시기는 750년경이다.이 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는 서기 770년경에 인쇄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세계 최고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일본보다 약 20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 최고의 목판 인쇄물 역시 우리나라보다 늦은 서기 868년에 인쇄한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숭불정책으로 불교가 융성하였고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간행하였다. 목판본으로 오래된 것은 1007년 총지사에서 찍어낸 「보형인다라니경」으로 불탑에 봉안하였던 두루마리이다. 그후 현종 2년(1011년) 거란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막고자 송악 대흥사에서 1087년까지 대장경판을 새겨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이 경판이 「초조대장경」이며 의천이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새긴 대장경이 「속장경」이다. 두 경판은 1232년 몽고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불타기 직전 찍어낸 책은 일부 전한다.고려의 강화도 천도 후에는 강화도에 대장도감, 남해도에 분사도감을 설치하고 1236년부터 16년 동안 다시 새긴 대장경이 「재조대장경」이며 현존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1374년에 백운화상이 엮은 책을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말 프랑스 초대 대리공사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하여 귀국하였고, 1911년에 경매로 앙리 베베르(H. Vever)가 소장하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기념행사인 「책의 역사」 전시회에 출품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이 책 마지막 장에는 인쇄시기, 인쇄장소, 인쇄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독일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가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42행 성서」보다 70여년이나 빠르다. 그래서 인류문화사상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고려시대의 금속활자는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개국 초기에는 발전을 보지 못하고 왕권이 안정된 태종 3년(1403년)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하여 이후 500여 년 동안 여러 종류의 활자를 만들게 되었다.동활자는 1403년에 만든 계미자를 시작으로 조선 말까지 갑인자, 병진자, 한글활자 등 40종을 주조하여 유교, 의학, 농업, 천문지리 등의 다양한 서적을 간행하였다.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재료는 대부분 구리였으나, 병진자는 납으로 만들었다. 철활자는 16세기경부터 만든 것으로 1692년 원종자가 처음이고 조선말까지 만들어졌는데 임진란 이후에는 개인에 의하여 철활자가 많이 만들어져 민간에 책이 보급되었다.조선시대의 목판인쇄를 보면, 중앙관서에서는 서적원 등에서 유교경전 등의 책을 찍어냈고 지장 감영에서는 명에 의하여 책판을 새겨 중앙으로 보냈고 고려본, 중국본, 중앙관서에서 간행한 책을 복각본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한문불경과 한글로 번역된 불경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이 간경도감본이다. 당시에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국왕 및 왕실판은 국시에 위배됨을 알면서도 공덕을 쌓고 수복기원과 죽은 이의 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불서로 정성껏 새겨 책의 장정이 우아하고 정교하다.목활자인쇄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는 고려 때의 서적원을 그대로 운영하여 1395년에 목활자로 「대명율직해」 100부를 찍었는데, 현재 번각본만 전한다. 1397년에는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목활자 찍어냈다. 세종 때는 한글과 한자 큰 글자를 목활자로 만들어 금속활자와 함께 사용하였다. 그후 목활자는 관공서가 아닌 서원, 사가 등에서 개인 시문집 등을 찍어내는데 많이 사용하였다.조선시대의 한글활자는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7년에 청동으로 한글활자를 만들어 갑인자와 함께 조판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글활자본이다. 한글 금속활자는 조선 말기까지 약 30종이 주조되었으며 한자와 활자와 함께 사용되었다.금속활자가 발명되고 5세기가 지난 뒤의 또 하나 인류의 역사적 혁명은 인터넷의 발명이다. 인터넷 역시 활자를 이용한 콘텐츠로 활자정보매체는 인류의 문화적 삶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나가고 있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이용 안내◆ 교통편: 경부고속도로는 청주 I.C에서 8㎞이며 중부고속도로는 서청주 I.C에서 5㎞시내에서 시내버스는 832번(운천동 고인쇄박물관 하차)861, 862, 864번(예술의 전당 앞 하차)고속(시외)버스터미널에서 831, 831-1(예술의 전당 앞 하차)◆ 청주고인쇄박물관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로 113◆ 전화: 043) 200-4511, 4561, 홈페이지 http://jikjiworld.cjcity.net/main/jikjiworld
지구의 역사를 약 46억 년으로 보고 있다. 약 44억 년 전에는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지구에는 바다가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34억 6천만 년 전에 존재했던 박테리아 화석이 호주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지구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생명체가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화석이다.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시기를 신생대 제3기 플라이오세(530만 년 ~ 180만 년 전)로 보고 있다. 그러니 화석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지구역사의 유
지구의 역사를 약 46억 년으로 보고 있다. 약 44억 년 전에는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지구에는 바다가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34억 6천만 년 전에 존재했던 박테리아 화석이 호주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지구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고 어떤 생명체가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화석이다.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시기를 신생대 제3기 플라이오세(530만 년 ~ 180만 년 전)로 보고 있다. 그러니 화석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지구역사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유물을 한 개인이 집념을 가지고 30여 년 간 모아 화석박물관을 만들어 지구과학의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경북 영덕에서 포항 쪽으로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장사해수욕장에서 약 5분 거리의 우측에 휴게소 같은 3층 건물과 주차장이 나오는 데, 바로 이곳이 1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화석박물관으로 문을 연 경보화석박물관이다.설립자 강해중 씨는 20대의 젊은시절부터 수석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지인이 화석을 모으면 큰 돈이 될 거라는 말에 30여 년 동안 30여 개국을 다니면서 화석을 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화석이 수천여 점으로 경보화석박물관뿐만 아니라 포항 구룡포에 있는 새천년기념관 내에 바다화석전시관을 운영하고 있고 2008년에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에 화석전시관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경보화석박물관에는 약 1,500여 점의 화석들이 시대별, 지역별, 분류별 특징에 따라 전시되어 있다. 3층의 제1전시관에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고생대의 삼엽충류, 중생대의 암모나이트류, 신생대의 매머드 이빨과 상아 등이 대표적인 전시물이다. 그리고 전시실 내벽에는 지구의 역사를 대변하는 화석에 대한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내용의 판넬이 걸려 있다. 2층의 제2전시관은 식물화석테마관으로서 규화목을 비롯하여 다양한 식물화석 13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특별전시관에서는 설립자가 세계 각 나라를 다니면서 모았던 지폐를 볼 수 있고 야외 전시장에는 규화목 화석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규화목은 지층에 묻힌 나무줄기가 외부로부터 물에 녹은 이산화규소가 스며들어 단백석으로 변화되어 화석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그런 규화목들 중에 길이가 수 미터에 이르고 둘레 또한 사람이 안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규화목들을 있는 데, 해외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옮겨 왔을까 생각하니 설립자의 화석 수집에 대한 집념을 엿볼 수 있었다.화석(化石, fossil)이란 지질시대 즉 현재부터 약 1만년 이상으로 오래된 시대에 살았던 생물의 유해와 흔적을 가리키는 데 생물체의 구조를 알 수 있는 물체, 발자국이나 생활 흔적, 배설물까지도 화석으로 취급된다.화석을 가리키는 Fossil이란 단어는 원래 라틴어의 Fossilis에서 기인된 말인데, 그 뜻은 땅 속에서 파낸 물건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지질시대에 살았던 생물의 유해와 흔적에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생물체가 화석으로 어떻게 보존되는가는 그 생물의 해부학적, 화학적 성질과 그 생물체가 땅에 묻힐 당시의 환경과 그 후에 속성작용(생물체가 땅에 묻힌 후 암석화가 되는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지하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화석은 지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화석의 역사를 크게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한다. 고생대는 지금부터 약 5억 7천만년 전에서 2억 4천 5백만 년 전의 사이를 말한다. 고생대를 다시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페름기로 구분한다.고생대의 화석으로는 주로 실루리아기의 삼엽충, 직각패, 필석, 복족류, 완족류, 석탄기의 연체류, 산호, 두족류, 데본기의 어류, 암모나이트, 육상식물, 잠자리, 석탄기의 종자양치식물, 양서류, 바다나리 등이 있다.중생대는 2억 4천 5백 년 전에서 6천 6백 40만 년 전까지로 트라이아스기, 쥬라기, 백악기로 나누어진다. 중생대의 화석으로는 조개류 중 다오네라, 엔토모노티스, 백악기의 공룡, 벨렘나이트, 쥐라기 어룡, 쥐라기 암모나이트, 쌍각류, 트라이아스기의 양서류, 거대 파충류, 삼각패, 이노세라무스, 시조새 등이 있다. 신생대는 6천 6백 4십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 신생대를 250만년 전까지의 제3기와 이후를 제4기로 나누고 제3기를 다시 오래된 시대부터 팔레오세,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로 분류하고 제4기는 홍적세, 충적세로 분류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신생대의 충적세라고 말할 수 있다.신생대를 포유류시대라고 부르는 데 중생대에 번영하였던 두족류인 암모나이트류나 파충류인 공룡류 등이 사라지고 포유류, 조류, 경골어류 등이 번성하였다. 그리고 무척추동물로는 유공충, 부족류나 복족류 등이 나타났고, 포유류로는 말, 코끼리, 코뿔소 등의 선조가 발전하였다.경보화석박물관 제2전시관인 식물화석 테마관에서 시대별로 볼 수 있는 식물화석은, 고생대의 대표화석으로 페름기에 멸종된 속새류의 일종인 노목과 페름기의 인목화석, 페름기의 양치류 화석과 종자고사리 화석이다.중생대의 대표화석으로는 강철나무와 아로카리아가 있다. 아로카리아의 구과(cone)가 화석화 된 것은 단면화석으로 내부의 정교한 구조와 치환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신생대의 대표화석으로는 물푸레나무와 편백나무, 벚나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송진이 굳어져서 만들어진 호박 속에 약 3천만 년 전의 개미와 모기가 포함되어 있는 화석이 있는 데 돋보기를 이용하여 내부의 곤충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아울러 아프리카 악어와 인도네시아 거북의 박제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그밖에도 오팔로 화려하게 치환된 규화목 화석과 여러 형태로 절단된 규화목 화석으로 나이테와 내부 구조를 관찰할 수 있으며 현생식물과 비교를 할 수 있도록 현생나무의 횡단면과 종단면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 기나긴 시간동안 식물이 자라온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과거 지구에 살았던 생물 중 일부만이 화석으로 보존되어 있지만 이들 화석은 지질시대의 자연과 생물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지구에 대한 과거여행의 안내자이기도 하다. 생물의 발자취를 화석을 통해 더듬어본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 이외에 인간이 탄생하기까지의 오묘함과 수많은 생물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미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지질시대의 오랜 선캄브리아기의 암석인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생대 동안에 관입한 화성암류인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선캄브리아기의 퇴적암층은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변성작용을 받아 대부분 변성암으로 되면서 그 속에 들어 있던 화석들의 구조와 형태가 파괴되어 화석 산출이 극히 드물다.화성암류는 지각 내부의 용융체(마그마)가 관입 고결되어 이뤄졌기 때문에 화석이 없다. 화석이 산출될 수 있는 퇴적암의 분포는 한반도 국토의 30%에 불과하여 다른 대륙(유럽, 아메리카)들과 비교했을 때 화석의 종류와 산출량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고생대 이후 퇴적층에서는 동물, 식물 및 미화석 등 여러 종류의 화석이 산출되고 있다.46억 년 지구의 신비가 살아 숨 쉬는 경보화석박물관은 세계 각국에서 모아온 다양한 화석들로 일반 국민뿐 만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산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어느 지인이 설립자에게 화석 수집이 돈이 된다고 했던 그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이토록 국내 최대의 화석 수집가로 박물관과 전시관 등 3곳을 운영하는 설립자는 나라의 애국자요 지역의 교육자이자 문화의 선지자로 돈보다 귀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립자의 건강과 경영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난 2017년 문을 닫게 되었다.
보석은 귀한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물건으로만 알았으나 요즈음은 그렇지도 않다. 결혼 예물로 받기 이전부터 쉽게 지닐 수 있는 흔한 물건이 보석이다.그러나 얼마 안 되는 과거에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였다.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면 이수일과 심순애는 연인 사이였는데, 경성의 부자 집안인 김중배가 심순애에게 결혼을 요청하자 심순애는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이수일이 심순애에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라고 했던 말 한 마디가 생각난다. 다이아몬드 하나에